★백두대간 9정맥산행/★백두대간

사선을 넘나들며 진행했던 백두대간

六德(이병구) 2011. 2. 27. 14:27

'01년 1월 7일 무리한 산행과 등반대장의 인솔에 따르지 않은 대원 때문에

조난을 당해야 했던 산행기를 올려봅니다.

단체 산행에 참여할 때에는 모두가 인솔자의 통제에 따라야 하고 인솔자는

산행보다 안전에 대하여 판단을 정확히 해야 될거라 생각됩니다.

저두 그때 산행코스만 생각하고 산행했다면 임대영씨는 지금쯤 저 하늘에서

청옥 두타산을 지키고 있을거라 생각되고 본인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쓴 산행기가 혹시나 님들께 보탬이 될까? 부끄러운 마음에서도 올려 봅니다.

 

20∼30년 만에 눈이 가장 많이 내린 2001년 1월 7일 ! 

생각하기도 싫은.... 

아니 임의로는 그 누구도 만들지 못할 생의 추억이기에 나에게는 죽는 그 날까지 잊지 못할 

추억이 되리라! 

음악이 흐르는 조용한 이 시간에 다시 한번 그 뒤안길을 돌아본다 

선두 가이드인 나는 2001년 1월 7일 새벽 4시 10분에 삼척시 댓재에서 자유인클럽

산악회 백두대간팀 21명을 선두에서 가이드하며 산행을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구멍이 난 듯 눈이 내리고 러쎌하는 나의 두 다리는 좀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댓재에서 목통령을 지나 두타산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6시 25분, 좌측으로 급히 떨어져

내려가 박달령을 지나 청옥산에 도착한다. 

나를 비롯한 선두 대원 9명이 청옥산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7시 45분 

난 오늘의 산행은 무리라 판단하고서 후미에 있는 한대장에게 핸드폰으로 교신한다 

(그날 따라 한대장이 무전기를 빠뜨리고 왔음) 

한대장에게 무릉계곡으로 떨어지자고 요청했으나 후미 낙오자들은 한대장이 탈출시킬테니 

나는 계속 진행하라한다 

우린 다시 청옥산의 중계탑 우측으로 떨어져 연칠성령으로 향한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하여 우린 연칠성령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시려오는 손을 불어가며 난 아내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다른 대원들은 빵, 떡, 과자등을

먹고 있는데 인천에 사는 대원 1명((임대영 氏)이 아침을 먹지않고 출발한다. 

가이드인 난 그 대원에게 정지를 명하였으나 그 사람은 그냥 출발해버렸다.

식사를 급하게 끝마친 우리 8명은 망군대를 지나 고적대를 힘겹게 오른 후 갈미봉을

향하여 진군한다. 

이곳에서 이기령까지는 어림잡아 2시간 그 곳에서 이기동까지는 1시간 30분정도 소요되리라 

생각하니 산행이 다 끝난 느낌이 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가는데 이게 왠 말인가? 

갈미봉 직전에서 좌측으로 진행하여야 되는데 앞질러간 대원이 우측 계곡으로 떨어진 것이 

아닌가?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난 나침반을 꺼내어 독도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큰 문제다.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내가 한마디 던진다 

모두들 이곳으로 내려가자고 

이러한 때에는 행동통일을 해야되니까 모두들 이곳으로 내려가야 된단다.

난 이 길은 백두대간 코스가 아니기 때문에 안된다고 했으나 내 마님이 내려가라는데

아내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법

허벅지를 넘는 눈 속에서 눈썰매를 타고 넘어지고 빠지고 내려간다.

그런데 이것은 대간 능선이 아니었다 

아쁠사! 우리는 피마늘골로 빠지고 말았다 

폭포를 눈썰매 타듯 엉덩이로 썰매를 타고 내려가고 하다보니 후퇴는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니 이제 앞으로 진행할 수도 없다.

벼랑 같은 폭포가 길을 가로막고 우린 계곡 능선을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가지만

이제 난감한 상태다.

그렇게 피마늘골을 따라 내려간 것이 벌써 2시간이 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벌써 눈은 무릎까지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후미 대원이 걱정이 됐다 

분명 후미 대원도 이곳으로 내려올 턴데......

커다란 폭포 입구에서 우리는 앞서간 임대영 대원을 발견했다 

탈진상태에서 혼이 빠져버린 임대영 대원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난 우리대원들을 구조해야 된다는 일념으로 계곡을 기어서 오르기 시작했다

아내가 말린다 

혼자 그렇게 올라가다가 서로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고

그러나 난 119신고를 위해서는 계곡을 빠져 나와야 되겠기에... 

어렵게 산 능선을 기어올라가 119에 먼저 조난신고를 하고서 한대장과 교신을 했다

 

한대장은 연칠성령에서 3명과 탈출하고 중간그룹 8명이 있단다 

교신을 하는 도중에 통신이 두절된다.

조난 신고는 되었으나 우리가 구조대원들에 의해 구조되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이다 

난 또다시 대원들이 있는 계곡으로 한참동안 내려오는데 나의 아내(경하), 이종기,

김춘호, 이용목, 이영찬, 임대영, 유태우, 그리고 오늘 처음 산행에 참여한 젊은 남자

이렇게 8명이 나의 발자국을 따라 올라온다.

난 우리 대원들에게 우리는 조난 당했다고 말한다. 

“조난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 

휴대폰도 터지질 않고 모든 연락이 두절되었다 

계곡에서 우측능선 좌측능선을 찾아 다녀도 보이는 것은 절벽뿐이다 

얼마 후 이영찬씨와 이종기씨가 능선을치고 올라가자고 한다.

그러나 난 반대를 했다.

왜..?

조난시에는 계곡을 따라 하산을 해야 된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기에 나는 반대를 하고

좌측계곡과 능선을 파노라마와 같이 넘다보면 절벽을 피하여 하산하자고 건넨다.

그러나 대다수가 다시 능선을 치고 올라가자고 하여 어쩔수 없이 난 앞에서 러쎌을 하며

어느 산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참 오르다보니 세월의 풍파에 변색된 리본이 간간이 보인다.

순간 다리에 힘이 솟아오른다.

입술을 깨물고 힘들게 힘들게 오르는데 무릎에 감각이 없어진다.

뒤따르던 아내가 나를 걱정한다.

그렇게 산을 오르기를 약 2시간 넘개 하다보니 우리는 어느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길은 찾을 수 없고 산하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난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 대원들에게 이야기한다.

우린 더 진행하면 이제 끝장이다.

내가 가이드니까 나를 따라 다시 하산합시다.

모두가 따르겠다고 하여 우린 올라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간다.

어두운 길을 더듬더듬 찾아 내려가는데 뒤에서 유태우씨가 랜턴을 건네준다.

나도 랜턴이 있지만 우리가 얼마동안 이 산에서 이 고생을 해야될지 모르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에서 쓸려고 그냥 내려가는 것이라 하니 그래도 선두에서 비추고 내려가면

자기들은 발자국을 따라가면 되니까 받으라 한다.

그래도 뒤에서 내 아내와 유태우씨가 나에게 마지막 힘을 넣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또다시 계곡으로 한없이 내려오다 보니 조금 전 그 계곡에 우리는 도착되는데

시간은 벌써 밤 9시가 넘어버렸다 

뒤따르던 아내가 나를 말린다 체력이 떨어지면 죽으니 다른 사람과 교대를 하라고..

아내가 누가 우리 신랑과 교대 좀 해줘요!

우리 신랑 쓰러지면 모두들 죽어요! 라 외친다.

그러나 누구하나 선두를 보겠다고 나서질 않는다 

아내가 다시 말한다.

그럼 여자인 내가 선두를 보겠다고

(사실 아침 4시 30분부터 지금까지 눈속을 러쎌한 나로서도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 

 

난 대원들의 인간성을 그곳에서 처음 판단한다. 

잠시 후 그곳에서 가장 연장자인 김춘호씨(55세)가 나선다.

집에 두고온 자식이 생각나는지 지리산에서 여기까지 동행한 아내가 울먹인다. 

눈 속에 엄마 아빠가 파묻혀 죽으면 두녀석은 고아가 될텐데... 

아내가 눈물을 흘린다 

너무나도 비참하고 허탈하고 원망스러웠나보다.

배꼽 근처까지 빠지는 이 눈 속에서 구조대를 기다린다는 것은 불가능하였기에

우리는 계속 걸어 다니기로 했다.(대관령 적설량 98Cm) 

불을 피워 체온을 유지하려 했으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어떻게 할수도 없고

해서 우린 죽지 않기 위해서는 내일 아침까지 움직여야 된다는 것을 서로서로 약속하고

내가 조금전 진행하자고 했던 좌측능선과 계곡을 따라 김춘호씨가 내 앞에서 러쎌을 한다.

너무나 고마웠다.

그렇게 해서 20분정도를 진행하는데 저 멀리 눈보라 속에서 불빛이 내 눈에 들어온다 

이건 분명 내가 꿈을 꾸고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난 소리를 지른다 "불이다" 우린 살았다. 

순간 대원들이 어디! 어디! 확인하고자 웅성거린다. 

모두들 끌어않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 때의 시간은 밤10시 20분이 넘었다. 

우리가 눈 속에서 18시간동안 돌아다닌 것이다.

 

조심조심 불빛을 향하여 하산하니 그곳은 관음사라는 조그만 사찰이었다. 

절에 도착하니 주지스님께서 말씀하신다. 

아까 9시 뉴스에서 나온 자유인 산악회의 회원이냐고 

그렇다고 대답을 하고서 난 다시 절의 전화를 이용하여 한대장에게 우리 9명 무사히 

절에 피신했노라 교신하고서 절에서 스님께서 끄려준 라면에 밥을 말아먹고 

고마움을 대신하기 위하여 각자 1만원씩 시주하고서 다시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하여 하산하니 그 시간이 밤 11시 40분 하산하니 그곳엔 우리 대원 이외에도 경찰, 기자, 

구조대원들이 우릴 반긴다. 

어느 구조대원이 원망의 한마디 내뱉는다. 

“죽을려고 ~ 이런 상황에 ~ ” 

얼어버린 몸을 녹이며 경찰관의 상황일지에 답을 하고서

밤 12시를 넘겨 서울을 향하여 출발하니 대관령이 막혀 그곳에서 또다시 이틀 밤을 

보내야 됐다. 

3박 4일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그 동안 TV뉴스와 일간 신문을 본 이웃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폭주하여 아들녀석들이 불안하였다 한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2001년 2월4일 백복령에서 이기령구간 산행이 또 시작되었고

그 지긋지긋하던 눈밭에서의 고생이 또 시작된다.

때로는 배꼽까지 빠지는 눈속을 나는 최진화총무, 정우현부회장과 교대로 러쎌을 하고

7㎞ 산행에 10시간 소요, 계획단축을 해야할 상황이다. 

상월산 포기하고 원방재(부수베리)까지 당초 계획을 수정하여 그 사실을 하산지점에서

대기중인 버스에 전달해야 하는데.. 

휴대폰이 불통이다. 

이일을 어쩐담 할 수 없다. 무릉계곡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한다. 

“자유인 산악회인데요, 눈 때문에 어려워요, 버스 좀 찾아주세요 ” 

“네엣 ? 자유인 산악회라구요 ?

원망스런 말투로 또 왔어요? 

잠시 후 아~~ 알았습니다 ! ” 

비상걸린 무릉계곡관리사무소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또다시 4월 29일 부수베리 원방재에서 상월사-이기령-갈미봉-고적대- 연칠성령-칠성폭포-

신선봉-삼화사 등산을 8명이 땜방하고 고적대와 갈미봉 사이에서 곰취를 많이 채취한다.

그 뒤로 내 아내는 무박산행을 단절하였으나 난 또다시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두대간을 2차 종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