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山과 近郊山行記/★명산근교산행

내변산 쇠뿔봉과 의상봉(우슬재-비룡상천봉-성인봉-원효굴-불사의방-의상봉-쇠뿔봉-지장봉-청림마을)

六德(이병구) 2019. 6. 25. 12:17

변산 의상봉(우슬재-비룡상천봉-성인봉-원효굴-불사의방-의상봉-쇠뿔봉-지장봉-청림마을)

.산행일시: 20190601(토요일)

.날 씨: 맑음(더운 날씨)

.산 행 자: 친구2명과 함께 六德

.산행거리: 13.5(의상봉 왕복 포함)

.산행시간: 6시간27(의상봉 왕복 포함)

.산행코스: 유동쉼터(08:08~10)어수대(08:16~20)우슬재/215m주능선(08:32)290m능선/조망(08:40)바위능선시작(08:47)조망1(08:52~54)반석바위전망대/묘지/어수대:0.9km이정표(08:57~59)400m/좌꺾임봉(09:03)435m/비룡상천봉분기봉(09:05)좌측전망대/전망대봉(09:10~15)묘지봉(09:17)445m/소나무봉(09:28)반석바위(09:30~47)성인봉/467.1m(09:49)468.9m/의상봉분기봉(09:55~59)322.2m(10:23)산죽숲(10:33)372.4m(10:40)계류/계곡(10:42)의상암터/전주이씨묘(10:53)원효굴갈림길(10:54)원효굴(10:56~11:18)원효굴갈림길(11:20)불사의방전망대(11:24~35)불사의방갈림길/소나무전망대(11:36~39)의상봉(11:42~48)부사의방갈림길(11:52)계류/계곡(12:02)의상봉갈림길(12:04)322.2m(12:25)의상봉분기봉/468.9m(12:56)고래등바위능선(12:57)쇠뿔바위(13:01)서쇠뿔바위봉/전망대(13:04~32)지장봉(14:04~09)새재(14:20~32)청림마을(14:37)

.산행후기:

오늘은 별다른 산행을 잡지 않고서 지난주 고향에서 12일 동안의 초등학교동창회에 이어서 다시 12일 일정으로 고향에 내려가 토요일은 내변산의 쇠뿔바위봉과 의상봉을 연계한 산행을 하고 일요일에는 본가로 이동해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뵌 후 텃밭에 심어놓은 감나무밭 제초작업을 하고서 돌아오는 것으로 계획을 세우고서 친구2명과 함께 금요일 밤9시경에 변산으로 내려가 토요일 새벽1시경에 변산에 자리하는 친구의 고향집에 도착해 3명이서 소맥을 몇 잔 마시신 후 새벽2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랫배가 살살 아파와 은근히 걱정하게 되었는데 결국에는 배탈로 인해 1주일 남짓 고생하게 되었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내변산을 산행하고 친구의 집으로 다시 돌아와 친구가 주말농사로 심어놓았던 마늘을 수확해놓고 내일은 내 본가로 이동해 친구들과 함께 감나무밭 제초작업을 하고서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는데 배탈로 인해 화장실을 몇 번 들락거리다 산행지로 떠나 내변산을 산행한 후 송포항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친구집으로 돌아와 마늘밭에서 마늘을 수확하고, 밤에는 다시 군산의 비응항으로 이동해 싱싱한 회를 곁들여 저녁식사를 하고, 일요일 오전에 본가 옆에 자리하는 감나무밭으로 이동해 감나무밭과 오가피나무 제초작업과 호박 그리고 단호박을 북돋워주고 대밭에서 죽순을 채취하고, 다시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뵌 후 돌아오는 것으로 12일간의 고향나들이를 마감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청계10마리를 가져다놓았는데 이걸 옥상에서 어떻게 키워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마침 큰처남이 닭장을 만들어 놓은 후 닭을 사 넣지 안했다해 처남한테 분양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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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묘역

​이곳은 옛적에 의상대사가 절집을 세웠다는 의상사 절터라고 하며,

​그래서 여기를 변산 의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원효굴입구삼거리

원효굴

부안의 개암사 뒷산 울금바위에는 원효방이 있고 건너편 서쪽의 의상봉에는 부사의방이 있다.

원효방에는 원효(元曉)대사가 기거하고 부사의방에는 사포(蛇包)성인이 기거했다.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의 남행월일기에 이 둘의 사연이 조금은 다르지만 설화로 기록되어 있다.

대사가 원효방에서 용맹정진을 할 때 성인이 찾아와 차와 식사를 공양해 주고 다녔다.

그런데 원효방에 물이 없어 불편했는데 성인이 주문을 하자 맛이 달고 젖과 같은 물이 굴에서 흘러나와 이 물로 차를 우려 주었다 전해진다.

원효대사는 왜 경주에서 머나먼 적국의 땅 부안의 울금바위에서 용맹정진에 들어갔을까..?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어느 날 해가 저물어 굴에 들어가 잠을 잔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더듬다가 바가지를 발견하고 그 안의 물을 맛있게 마신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굴은 무덤이고 바가지는 해골이며 해골의 물을 마신 것이다.

원효는 한참을 토해내다 문득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하고 의상은 유학길에 오른다.

원효와 의상의 유학 가는 코스는 어디로 해서 갔을까.

삼국유사나 해동고승전의 기록처럼 동아시아 최대 군사강국인 적국 고구려의 요동을 거쳐 가는 위험하고 먼 길을 목숨을 걸고 갔는지 의문이 든다.

 당시 신라는 덜 위험하고 시간도 적게 걸리는 멸망한 가야가 중국을 가기 위해 이용했던 서해로 나와 뱃길로 건너던 길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함안에서 육십령을 넘어 가야의 마지막 세력이 남아있었던 장수에서 백제의 경계가 소홀한 장계 진안 임실 정읍을 거쳐 부안 변산의 산길을 이용하여 격포의 성황당에서 중국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라 두 대사도 이 길을 이용했을 확률이 높다.

날이 저물어 들어간 무덤도 백제마한세력권의 횡혈식 무덤이 한쪽이 열려있어 손쉽게 들어갈 수 있다

정읍의 영원과 고부의 나지마한 산자락에는 수많은 석실무덤과 함께 이 석재들을 캐냈던 고대 채석장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무덤에서 해골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의상을 배에 태워 유학을 보내고 내변산에 들어와 수십 척 높이의 원효굴에 자리를 잡고 불교공부에 들어갔다

건너편 수백 척 절벽에 구멍을 뚫어 구리기둥을 박고 암자를 지어 살던 뱀처럼 생긴 성인이 날마다 대사에게 차와 공양을 해 준다

사포성인은 왜 뱀처럼 생겼다 했을까우리 선조들은 선인은 축지법을 사용하고 중국은 무협에서 화경의 고수는 이형환위 술법이 있다고 한다성인은 날마다 원효방과 부사의방을 오가며 움직이는 궤적이 길게 이어져 뱀이 움직이는듯하여 이렇게 부른 것 같다.


진짜 원효굴은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우금산 개암사 뒤쪽 울금바위(동봉)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데,

개암사 뒤편 오른쪽으로 약 700m 오르면 만나게 되고, 좌측에는 복신굴, 우측에는 원효굴이 위치한다.

내변산에는 원효굴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개암사 울금바위에 있는 것이고 하나는 부사의방장 아래 있는 이곳인데.. 원효대사가 천년 고찰인 개암사를 중창할 때 울금바위와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 하여  원효굴이라 합니다.

다음에는 저 바위능선을 타고서 진행해봐야겠네요.

진표율사가 3년간 수행했다는 부사의 방

진표는 완산주(현재의 전주) 만경현 사람으로, 12세 때 금산사 숭제법사 강석에 가서 출가하기를 청했다. 숭제법사가 수행을 통해 계법을 구할 것을 권유하자 선계산 부사의암에 머물며 수행했다. 이 때 택한 수행법이 망신참(亡身懺)이다. 돌에 머리와 사지를 부딪치며 7일을 계속하니 무릎과 팔은 다 부서지고 바위 위로 피가 비 오듯 흘렀다. 그러나 부처님의 계시가 없자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7일을 더하니 마침내 지장보살이 나타나 계를 줬다. 그 때 나이 스물 셋이었다.

그러나 미륵보살에 뜻을 두었던 진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영산사(변산 능가산)로 옮겨가 처음과 같이 수행하자 마침내 미륵보살이 나타나 〈점찰경〉과 증과(證果) 간자 189개를 주었다. 그 중 제8간자와 제9간자는 미륵보살의 손가락뼈로 만든 것으로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상징한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접하고 있는 진표율사 관련 이야기는 일연의 제자 무극이 ‘진표전간’ 바로 뒤에 첨가한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 부분이다. 발연수는 금강산에 있는 장소로 진표가 미륵불의 간자를 얻은 후 바다의 물고기에게 계를 설하던 자리다. 진표율사가 수행하다 입적한 곳이며, 사리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비석은 발연사 사주 영잠이 1199년에 세운 것으로 〈삼국유사〉 보다 100년 가까이 앞선다. 그러나 두 기록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부사의방의 위치다. 일연은 선계산에 부사의암이 있고, 진표율사가 능가산에서도 수행했다고 한 반면 발연수석기는 변산 능가산을 그곳이라고 적고 있다. 또 시기의 차이다. 일연은 율사가 지장보살을 친견했을 때의 나이만 기록했을 뿐 미륵보살을 만난 때의 시기를 명시하지 않은 반면 발연수석기는 27세 때 수행을 시작해 3년 만인 762년 4월 27일 양대(미륵ㆍ지장)보살을 만나 계본과 두 개의 나무간자를 얻었다고 명확히 하고 있다. 이밖에 쪄서 말린 쌀 20말을 식량으로, 이 중 다섯 홉을 하루 양식으로 생활했으며, 한 홉의 쌀은 다람쥐에게 나눠줬다는 내용 역시 석기에만 전한다.

진표율사가 이곳에서 육신을 바위에 부딪쳐가며 하는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수도를 하였는데 깨달음에 진전이 없자 절망하여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때 지장암에 숨어서 이를 지켜보던 지장보살이 받아주어 살았는데 진표율사는 더욱 정진하여 계를 얻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부사의방 不思議方

不思議 - 세간의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는 것

    진표율사3년 동안 머물며 수행에 정진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3년씩이나 지냈다니

이 또한 불가사의한 일이어서 불사의방 이다

2~3평 남짓한 공간으로 진표율사가 3년 동안 수행하면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을 친견한 곳으로,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 계를 구하는 망신창법(亡身懺法) 의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진표율사가 이곳에서 육신을 바위에 부딪쳐가며 하는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수도를 하였다는데 깨달음에 진전이 없자 절망하여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때 지장암에 숨어서 이를 지켜보던 지장보살이 받아주어 살았는데 진표율사는 더욱 정진하여 계를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부사의 방장을 작품으로 표현해보았다.

좌측은 쇠뿔바위봉이고 우측은 지장봉인데 지장보살이 진표율사의 수행을 지켜본 바위라 해서 지장암이라 부릅니다.

부사의 방 입구....밧줄타고 8미터 정도 내려가면 부사의 방에 내려설 수 있다.

살며시 보이는 부사의방

의상봉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상대사가 '의상암'을 짓고 머물러서 의상봉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산 동쪽 기슭에 의상암 터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도에는 '기상봉'이라고 되어있는데 이는 '조선지형도'에 기재된 의상봉(倚上峯)의 '의지할 의()'자를 '험악할 기(崎)'자로 잘못 옮겨서 그렇다고 한다.
정상석은 부대 안에 있는데 군사시설이라 들어가지 못하니 일반인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투구봉능선을 배경으로 / 다음에는 저 투구봉의 암릉을 타고서 마천대로 올라야 되겠다.

쇠뿔바위봉에서 바라본 의상봉 마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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